가야의 글방

밤꽃의 추억

눈꽃가야 2025. 4. 28.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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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남산에 다녀오는 길 아파트 화단에 밤꽃이 하얗게 피었다.

밤꽃이 피었구나

밤꽃이 피었어!

키가 큰 밤나무는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종로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했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새벽마다 오르던 인왕산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았다.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막냇동생이 사는 이곳으로 이사를 했지만, 한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 처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비교적 일찍 독립을 했던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지 않은 집에서 산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부유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조건이 그만큼 소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첫째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들고

둘째 자연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곳

이런 조건을 갖춘 집은 종로에 의외로 많아 힘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때문에 내가 살던 집은 대부분 낡고 초라했다.

밤나무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밤꽃을 올려다본다.

내 사고는 빠르게 과거로 회귀하여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간다.

거기 풋풋한 20대 초반의 내가 있다.

남한산성 초입을 걷는 발걸음은 가뿐하고 손가방에 든 미래를 담보할 작은 수첩이 들어있다. 20대의 나는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인 약사사에 가는 길이다.

 

작은 암자인 약사사가 새로 불사를 하여 단청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단청을 직접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직접 만나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등등 궁금한 점이 많았다.

산사로 오르는 길은 좁고 가파르지만, 그런 길을 걸을 때면 묘한 긴장과 떨림이 있다. 가끔 숲이 주는 선물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찔레꽃은 이미 졌고 운 좋으면 산딸기도 몇 개 따 먹을 수 있었다.

약사사에 거의 다다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앉아 쉬려는 데,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그윽하다. 처음 맡는 향기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향기의 근원을 알 수 없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난 뒤에 나는 한 나무에 시선이 멎었다. 거기 생전 처음 보는 흰 축포를 터뜨린 것처럼 흰 꽃이 무더기로 피어있었다. 약간 비릿하면서 알싸한 그 향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했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이었다.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곳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워 몇 번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약사사에 다다랐다. 서너 명이 높다란 작업대 위에서 단청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라 조금 당황했다. 단청은 철저히 분업 형태로 이루어졌고,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가 기대했던 장인의 모습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대가 부응하지 않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귀한 시간을 할애한 만큼은 얻어 가야 한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높은 작업대 위에서 작업하는 그들은 위태로워 보였는데, 촘촘한 선을 그리면서 내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을 했고, 나는 그들을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아팠다. 내가 원했던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짜증이 조금 났지만, 그들에게 줄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내면서 이마의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때마침 바람이 살랑 불었고 조금 전 나를 혼미하게 했던 그 꽃향기가 풍경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아, 이 향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온몸으로 그 향을 들이마셨다. 고요한 산사에 그 말은 낮은 징 소리처럼 퍼져나갔다. 그러자 이마에 수건을 동여맨 채 밑그림을 그리던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밤꽃 향기를 좋아하면 어쩐대요?"

"지금 저 향기가 밤꽃 향기예요?"

"그럼 밤꽃에서 나는 냄새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한 거 남유?"

그 말에 나는 조금 전 보았던 흰 폭죽을 터뜨린 것 같은 꽃이 밤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암자 주변에 밤나무가 꽤 여러 그루가 있었다.

"왜요? 밤꽃 향기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던 탓에 기분이 나빠졌다. 날카로운 내 말에 스님이 나오시면서 인부들에게 말했다.

"왜 친절하게 대답 좀 잘해주시라니까 우리 애기 보살님을 놀리고 있어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스님을 보며 말했다.

 

"스님, 내가 저 보살님을 놀린 게 아니라 아가씨가 밤꽃 향기가 좋다고 해서 아직 나이도 어린데 밤꽃 향기를 좋아하면 어쩌냐고 그랬더니 왜 좋아하면 안 되냐고 따지네요. 나는 그 이유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께 스님이 저 보살님한테 말해줘요."

그 말을 들은 스님의 얼굴이 빨개졌고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직감했다. 은밀한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스님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단청에 관한 좋은 작품 소재를 얻으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에 잔뜩 화가 났는데, 그런 모욕까지 당하고 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편치는 않았다. 다시 밤나무 밑에 서서 오래도록 그 밤꽃 향기를 맡고 또 맡았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들이 주고받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쁘게 살다 보니 밤꽃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종로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해 우연히 계남산에 갔다 오는 길에 밤송이를 열린 밤나무를 보게 되었고 너무나 반가웠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밤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올해 처음으로 밤꽃을 보게 된 것이다.

밤꽃

밤꽃은 암수 한 그루로, 암꽃과 수꽃이 새로 난 가지 밑부분 잎겨드랑이에서 곧게 자라나 기다란 꼬리 모양 꽃차례가 무리 지어 핀다.

수꽃차례는 유백색이고, 암꽃은 수꽃 아래에 보통 3개씩 한 군데에 모여 달리고 포로 싸인다. 위 사진에서 유백색의 고양이 꼬리 같은 유백색 꽃이 수꽃이고, 노란 말풍선이 가리키는 가늘고 새끼를 꼰 모양이 암꽃이다.

 

꽃은 흰색이나 옅은 노란색을 띠며, 6~7월에 피어 정액과 비슷한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데, 이는 밤꽃이 정액에 든 성분인 스퍼미딘과 스퍼민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때 그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던 것이다.

그 뒤 단청에 관한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밤이나 밤나무를 보면 그때가 생각나 웃는다.

 

세월이 흘러 내 후각(嗅覺)이 무뎌졌는지 밤꽃 향기는 그때처럼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도록 밤나무 곁에 서서 고개가 아프도록 보고 또 본다. 이십 대 초반 풋풋했던 그 시절 남한산성에서 밤꽃을 처음 보고 행복했었던 그때처럼..

 
 
 

 

양천구 목동 11단지 화단의 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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