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산의 저녁, 이팝나무와 병꽃, 그리고 고양이
🌙 갈산의 저녁, 이팝나무와 병꽃, 그리고 고양이
어둑어둑 저녁,
도시의 바쁜 하루가 숨을 고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조용히 갈산에 올랐습니다.
사람들보다 나무가 먼저 인사해 주는 산.
멀리 신도림동의 빌딩 숲 너머로
관악산이 어렴풋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안양천은 그 사이로 은빛 실선처럼 흐르고 있었죠.
🌿 산딸나무와 이팝나무, 5월의 얼굴들
입구에서 맞이한 건 하얀 별무리 같은 이팝나무 꽃.
'쌀밥처럼 피었다'는 이름답게,
하얗게 수북이 쌓인 꽃잎들은
정자 지붕 위로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조금 더 걷자 산딸나무도 만났어요.
네 잎처럼 펼쳐진 포엽 안쪽에 조심스레 숨겨둔 꽃,
그 수줍은 모양새가 왠지 내 마음 같더군요.
🌸 병꽃나무와 아까시, 향기로 물드는 길
병꽃나무는 등불 아래서
진분홍빛을 더 강하게 드러냅니다.
병 모양을 닮은 작은 꽃들이
마치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 옆으로는 흰꽃이 우수수 피어난 아까시나무.
달콤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코끝을 들이밀었죠.
벌도 없이 조용한 저녁, 향기만은 여운처럼 길게 남았습니다.
🌲 메타세쿼이아 숲, 그 낯선 질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든 터널길,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여전히 나에겐 익숙하지 않아요.
자연인데도 너무 인공적인 질서가 느껴져
어딘가 어색하고, 그래서 더 오래 눈이 머물렀습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신도림과 관악산
숲길을 따라 오르다
도시의 전경이 훤히 펼쳐지는 전망대에 다다랐습니다.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신도림동,
그리고 그 위로 걸려 있는 달빛 한 점.
이곳이 이렇게 멋진 서울의 전망 명소였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네요.
🐾 고양이들이 지키는 공원의 끝
갈산공원 초입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계단,
가로등 불빛 아래에 고양이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낯선 이를 경계하면서도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는 듯한 모습.
텅 빈 정자 아래서
그들은 묵묵히 저녁을 마무리하고 있었지요.
🌌 갈산의 밤, 마음의 쉼표 하나
숲을 걷는 일은 늘 그렇듯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자연은 말을 걸지 않아 좋고,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얀 꽃, 분홍빛 꽃, 초록의 나무들,
그리고 멀리서 반짝이던 도시 불빛.
오늘 저녁, 나는 그 풍경 사이에
살며시 쉼표 하나를 찍었습니다.